왕을 만든 사람들, 그들을 읽는 11가지 코드 도서




항우는 범증을 아보라고 불렀다. 아버지에 버금가는 존재란 뜻이다. 항우가 범증을 좀 더 잘 활용했으면 <초한지>의 결말이 뒤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항우는 개인적인 역량과 집안 배경, 군사적인 능혁 그 모든 면에서 유방보다 앞섰다. 항우의 군사가 40만 명일 때 유방의 군사는 10만 명에 불과했다. 바로 그때 범증은 유방을 제거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100명의 기병들만 이끌고 홍문연에 온 유방의 운명은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위기에 빠진 유방은 장량의 계책에 따라 항우의 숙부 항백을 끌어들였다. 항우는 눈치를 보느라 범증의 재촉에도 유방을 제거하지 못했다. 범증은 항우의 종제 항장에게 검무를 추는 척하다가 유방을 죽이라고 다시 지시했으나 이마저도 항백의 방해로 실패했다. 끝내 유방이 도주하자 범증은 유방이 준 옥두를 부수면서 말했다.

 “오호라! 어린아이와는 일을 도모할 수 없구나. 항우의 천하를 빼앗을 자는 반드시 유방일 것이다. 우리 족속은 지금부터 유방의 포로가 될 것이다.”

 초한대전은 범증의 예견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범증을 제거해야 천하를 가질 수 있다고 판단한 유방은 진평의 계책에 따른 반간계로 항우와 범증을 갈라놓았다. 사면초가에 빠진 항우는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건만 우여! 우여! 그대를 어찌할 것인가!”라는 유명한 시를 읊조리다 죽어가야 했다.

 유방이 항우보다 뛰어났던 것은 참모 영입과 그 활용 능력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하나의 차이가 천하의 패자가 뒤바뀌는 결과를 낳았다. 그만큼 참모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중국사는 일종의 참모사다. 그런데 이런 참모사의 주역들은 보통 참모들이 아니었다. 항우조차도 한때 범증을 아보로 높인 것처럼 ‘스승 사’자가 붙는 왕사이고 ‘나라 국’ 자가 붙는 국사들이다. 그래서 중국사는 왕사사 또는 국사사다.

 한국사와 중국사의 다른 점 중 하나는 참모사와 군주사다. 중국사는 참모사인데 비해 한국사는 장사, 즉 군주사라는 말이다. 장사는 수직으로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급전 낙하하기 일쑤다. 가까운 현대사만 보더라도 정상 부근까지 날아갔다가 추락한 예가 수도 없이 많다. 그 원인은 여럿이겠지만 이런 인물들에게는 ‘스승 사’ 자로 높이는 참모가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혼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행한다. 그러니 자신의 날개가 밀랍으로 붙인 깃털인지도 모르고 태양 가까이 날다가 밀랍이 녹아 떨어져 죽는 이카로스의 사례가 반복되는 것이다.

 그럼 왜 한국사의 장들은 참모들을 활용하지 못할까? 먼저 자신이 최고라는 자만심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참모들이 자신의 지위를 빼앗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기 때문이다. 참모가 군주보다 뛰어난 경우는 많다. 그러나 하늘은 참모보다 부족한 장에게 천명을 내린다. 그래서 장은 장이고 참모는 참모가 되는 것이다.



 참모는 군주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존재다. 장이 자신보다 부족한 듯 여겨서 그 자신이 장이 되려고 하는 순간 비극은 발생한다. 한국사에서 이런 이치를 정확하게 깨달은 인물이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취중에 종종 “한 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 고조를 쓴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태조실록>은 전한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천명 받은 존재로 만들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제 한 몸 건사하기 힘들었던 존재였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 이성계를 개국 군주로 만드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란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성계 또한 정도전의 머리를 빌려야 자신이 개국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성계와 정도전은 한국사에서 그리 흔치 않게 보이는 군주와 참모의 전형이다.

 참모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는 후계과정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이다. 정도전도 이 문제를 잘못 다룬 결과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장량은 달랐다. 고조 유방이 태자를 갈아치우려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을 안 황후 여후는 장량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장량은 자신 역량 밖의 일이라면서 대신 태자 곁에 동원공 등 4명의 은자를 두라고 권고했다. 그 결과 태자는 위기를 극복하고 해제로 즉위했고, 장량도 고종명할 수 있었다.

 왕사나 국사는 단순한 책사가 가질 수 있는 칭호가 아니다. 진평이 유방을 구한 횟수는 장량보다 훨씬 많지만 장량을 왕사로 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장량이 노선을 갖고 있던 왕사라면, 진평은 눈 앞 현실의 어려움을 타개하는 책사이기 때문이다.

 참모사의 관점으로 한국사를 서술해보려는 생각은 꽤 오래되었다. 한국사를 이런 관점으로 볼 때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크게 킹메이커와 왕을 보좌한 참모들로 나눌 수 있다. 킹메이커는 자신이 선택한 인물을 통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꿈을 꾸는 사람들은 지금도 많지만 실현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정도전 처럼 세상을 움직이는 본질에 능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역사를 바꾼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주류였다는 사실이다. 정도전은 물론 삼국통일의 주역인 신라의 김유신과 김춘추도 당대에는 비주류였다. 유비가 일개 농사꾼에 불과했던 제갈량의 초옥을 3번이나 찾아갔던 것 역시 그가 비주류였기 때문이다. 삼고초려가 없었던들 유비는 천하 제패는 물론 촉왕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제갈량이 천하를 셋으로 나눈 후 척박한 촉의 땅이라도 차지해서 왕 노릇하자는 ‘천하삼분지계’를 내놓는 덕분에 유비는 촉왕이라도 될 수 있었다. 유비와 제갈량에게 부여한 시대의 역할은 그 정도였다.

 그러나 이따금 비주류들은 역사를 바꾼다. 때로는 김유신처럼 무력으로, 때로는 정도전처럼 사상으로, 때로는 소서노나 천추태후처럼 노선으로 역사를 바꾼다. 인수대비처럼 자신과 가문을 위해 킹메이커로 나섰다가 불행해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천하의 향배가 정해졌다고 참모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수성도 창업 못지않게 어렵고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성기의 군주들은 체제에 안주하기 쉽다. 그래서 평범한 군주들은 인재 발탁을 게을리한다. 자신의 귀에 쓴 소리를 하는 충신은 멀리하고 단 소리만 하는 아첨꾼을 중용한다. 조선 전기의 태종과 세종이나 후기의 정조가 성공한 임금이 될 수 있었던 주요인은 인재 발탁에 전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황희는 뛰어난 군주 밑에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던 행운의 사람이었다. 김종서도 뛰어난 군주 덕에 문신으로 출발해 장군의 역할까지 했던 인물인데, 이미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생략했다.

 가장 처신이 어려운 경우가 암군, 즉 혼군을 만났을 때다. 이런 혼군 밑에서도 시대를 버릴 수 없는 것은 임금보다 나라와 백성들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최악의 군주 밑에서 최선의 성과를 거두었던 인물이 유성룡인데, 이 역시 <난세의 혁신리더 유성룡>에서 이미 다루었기에 포함하지 않았다.

 그다음으로는 보통의 군주 밑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참모들이 있다. 김육이 이런 경우인데 특이한 것은 대동법이란 정책으로 군주를 보좌했다는 점이다. 효종이 재위 7년(1656), “김육의 고집스런운 병통은 죽은 후에야 그칠 것이므로 (대동법에 대해서) 흔들릴 리가 없을 것이다”라고 고개를 흔들 정도 그는 대동법 시행에 정치 생명을 걸었던 재상이었다. 김육의 그런 고집이 있었기에 사후 현종 11~12년에 있었던 경신대기근 때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때로 참모는 악역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진정한 참모는 독배도 기꺼이 들이마시는 인물이다. 숭명반청의 이데올로기가 압도하던 시절 악역을 감내했던 인물이 강홍립이다. 조명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던 강홍립은 명나라가 이미 청나라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그 후 진행된 역사는 강홍립의 판단이 맞았음을 말해주지만 숭명반청이 지배하던 현실은 그를 매도해왔다. 이런 강홍립의 행적을 이제는 재평가할 때가 되었다.

 조선 전기가 역동적이었던 것은 이념형 참모 못지않게 실무형 참모, 즉 기술 참모도 중용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한미한 출신으로 고위직, 심지어 판서까지 올라간 참모들이 있었다. 장영실과 박자청이 그런 경우인데 장영실은 그간 많이 다루어졌기에 이 책에서는 박자청을 다루었다. 정도전이 한양 도읍의 설계자라면 박자청은 그 건축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역사 유적 곳곳에는 아직도 박자청의 손때가 묻어 있건만 그간 소홀히 다루어졌던 것 또한 그가 한미한 가문 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홍국영은 정조의 즉위에 큰 공을 세웠지만 자신의 역할을 과대평가했다. 그래서 정조시대의 방향키를 그릇 잡았고 왕위계승문제에도 과도하게 개입했다. 그런 이유로 결국 자신의 몸도 불행해지고 역사에서도 버려졌다. 역린은 군주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만 건드려야 하는 법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장점, 즉 후대인이 전대인을 바라보는 장점은 일의 시작과 과정, 결말까지 모두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역사는 현재를 비춰보는 거울이 되기에 <자치통감>이나 <동국통감>처럼 역사서에는 ‘거울 감’ 자를 자주 쓴다. 앞선 수레바퀴라는 뜻의 전철이 역사의 이칭으로 사용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그러나 앞의 수레가 잘못된 길을 가다가 거꾸러지는 것을 보고도 다시 그 길로 가는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 인간의 역사다. 왜 그럴까? 아마도 욕심이나 오만이 인간의 눈을 가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자신은 물론 세상에 대해서도!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더욱 역사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 겸험하게 성찰하는 자에게만 역사는 미래의 문을 살짝 열어주기 때문이다. 역사서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날고 기는 사람들이 거꾸러진 사례를 나열해놓은 책이기도 하다. 책을 쓸 때 나 자신의 해석은 비교적 자제하는 편이지만 이 책에서는 일부 해석을 사족으로 달았다. 현재 사회의 바람직한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고민의 소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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